산행기2009. 2. 12. 08:12

소청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용아장성.


비선대를 지나 천불동안으로 들어갈 때에도 조금은 어둠이 남아있는 아침이었다.
천불동으로 깊이 들어가면서도 산행을 앞두고 심설시기의 설악산산행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했지만 겨울의 설악산은 예측불가능한 면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비선대를 훨씬 지나 뒤돌아보니 좀 밝게 빛나는 거대한 암주처럼 비선대바위가 솟아있는게 보인다. 이때 시간은 7시27분이었다.

천불동의 개울은 대부분이 얼어있었고 조금 깊은 담에는 얼음짱 중간이 삥뚫려 푸른기운이 도는 맑은 물이 찰랑거렸다. 계곡주변 암사면을 보면 흐르던 물은 모두 얼어 작은 빙폭을 이룬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계곡안은 어둡고 햇빛이 비치는 암봉들의 위쪽은 훤하게 보인다. 동쪽 하늘에 반달이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다. 천불동의 겨울풍광은 사실 황량하다. 나목의 가지들이 을씨년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햇빛을 받지 못해 검은 회색으로 보이는 점이 더욱 그렇다. 게다가 눈도 온지 좀 오래됐는지 순백의 눈은 아니다. 더욱이 꽤나 차거운 바람이 협곡을 따라 불어내려오거나 옆댕이에서 훅하니 옷깃을 펄럭이게 하거나 하여 느닷없는 방향에서 불어대니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참 들어가니 좁은 협곡사이로 암주가 하나 쑥 솟아있다. 귀면암이었다. 귀면암아래 개울옆길에 내려오니 8시 16분이다.
오련폭에 도착한 시간은 9시 17분경이었다. 이제부터는 경관이 웅대해진다. 개울가의 단애도 엄청나게 높아진다.
오련폭으로 올라가기전 오른쪽 옆 소협곡에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빙폭이 형성되어 있다. 오련폭을 끼고가는 철사다리 오르막길은 우측옆의 꽤 넓은 급경사 암사면때문에 겨울에는 신경을 써야하는 곳이다. 여기에 눈이 쌓이면 눈사태가 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양폭산장에 도착한 것은 9시 40분경이었다. 산장앞 길옆에 만들어 세워놓은 작은 눈사람 두 명이 반긴다. 눈사람앞에서 청설모란 놈이 떡하니 앉아 오는 사람을 말똥말똥 쳐다본다. 일본의 환경전문가는 이런 동물들은 이미 죽은거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제힘으로 자기몸에 맞는 것을 구해 살아가야 할 놈이 사람이 주는 단 음식에 길들여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놈도 꽤 살이 쪄서 제 또래보다 훨씬 커보인다. 만일에 눈이 많이 와서 한달가량 사람이 못온다고 하자. 그러면 이 청설모는 어떻게 되겠는가?

커피한잔을 마시며 한숨 돌린뒤 양폭옆 철사다리를 오른다. 음폭골 옆 망경대가 아침햇살을 받고 그 웅장한 힘을 주변에 과시하고 있다. 정상쪽으로 뚫린 협곡을 바라보면 좌우양측에서 계곡바닥을 향하여 몇개의 암릉을 뻗어내리고 있고 그것들이 중첩되어 험준한 풍광을 만들어내고 있다. 소청쪽이 잠시 보이는 듯했는데 그쪽은 설연을 날리는 폭풍이라도 부는지 썩 투명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천당폭포가 보인다. 직폭이 아니라 얼음 때문에 와폭처럼 보인다. 신선봉이 보이는 희운각 올라가는 급경사 숲길은 11시 40분경에 통과하고 11시 49분에 주능선에 올라선다. 백두대간이 희운각에서 신선봉을 거쳐 공룡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가야동으로 내려가는 개울건너 계단을 통과하여 능선에 올라서니 천당리지가 내려다 보이는데 염주골과 그 주변의 경관이 엄청난 암벽들로 구성되어 보는 눈을 질리게 한다. 그 뒤에는 화채봉이 뾰족하다. 희운각쪽으로 가면 가야동을 한참 내려가면 나오는 망경대말고 그 이전의 꼭 망경대를 닮은 봉우리가 눈에 띈다. 나목숲사이로 공룡의 범봉이 보이기 시작한다. 12시 37분 되면 공룡이 완전히 시야에 들어온다. 숲을 벗어난 전망대에서다. 이 전망대의 높이는 범봉이나 신선봉보다는 낮아 보인다. 죽음의 골짜기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을 지나면 1시44분경 전나무숲지대가 나온다. 소청전망대에 도착한 것은 2시경이었다. 이곳에서 중청대피소까지는 30여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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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청봉의 일출. 폭풍에 눈가루(설연)가 날린다.

미끄러운 전나무숲의 심설을 딛고 소청봉위에 올라서자 귀떼기청봉쪽에서 불어오는 초속20m의 바람이 내설악을 내려다보려고 전망대의 손잡이를 잡으려는 필자를 사정없이 뒤로 밀어버린다. 카메라를 제대로 잡기도 힘들다. 어마어마한 풍력이다. 소청능선에서 대피소에 도착하기까지 몇 10분에 지나지 않은 시간동안 바람의 매를 얼마나 얻어맞았던지 대피소안으로 들어서자 정신이 확드는 것 같다. 만일에 고어텍스자켓없이 산에 올라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방풍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있을 수 없다. 대피소에 3시가 못돼 도착했는데도 바람때문에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다. 일몰이라도 찍어볼까 했는데 능선의 바람을 생각하면 용기가 안나는 것이다. 내일 아침(2월7일) 일출을 보는 것으로 대신해야 겠다.
그런데 해질무렵에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짙은 운무(가스)가 끼여있고 눈앞에 경주하듯 달리는 미친말들의 엄청난 레이스가 벌어지고 있다. 레이스뿐만 아니라 미친 말들은 온몸으로 대피소에 힘껏 부딪치기도 해서 이런 소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대피소마저 날아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걱정될 지경이었다. 그때 한떼의 아이들이 사색이 다 된 채 대피소에 들이 닥친다. 사람을 날려보낼 것 같은 바람에 오색에서 정상을 거쳐 대피소로 내려오는 사이 꽁꽁 얼어버리다 시피한 아이들은 장애아(약간의 언어장애일뿐 보통아이들이나같다) 들이다. 자원봉사자와 선생님들까지 모처럼 날씨도 좋아 설악산에 도전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후미가 아직도 2시간 거리로 떨어져 있어서 조난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저녁무렵에 날아든 이 소식으로 대피소분위기는 삽시간에 긴장의 극을 이룬다. 일행을 인솔하고 온 선생님은 안절부절을 못하고 구조대며, 행정기관이며 닥치는대로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사람의 심리란 묘해서 그러는 선생님들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무슨 선생님이 준비도 없이 이런 날씨에 아이들을 데리고 덜렁 설악산에 올 수 있느냐는 표정들이다. 하지만 사태는 심각했다. 먼저 도착한 아이들도 손이 얼어 고통을 호소하고 침상바닥에 나뒹굴기도 하여 보는 사람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처음엔 동상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다행히 동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머지 아이들(고교1년생정도의 장애아들)의 문제였다. 바람의 강도로 봐서 이들이 겨울산행의 장비라고 착용한 옷들을 입고 산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의 실수를 그냥놔둘 것 같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 저체온증의 회생자를 낼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일이었다. 후미를 담당한 여선생과 어렵사리 무전연락이 되었는데 방금전 능선턱받이에 올라섰다고 한다. 이들은 오색에서 설악폭포까지 오는데만 5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무전에 의하면 오색에서 대청봉을 오를 때 가장 난 코스인 급경사지대를 통과하여 약간 평탄해지는 정상아래의 전나무지대에 올라왔다는 얘기였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3사람의 직원이 긴급구조대를 편성하여 그들을 구원하러 나섰다. 그들이 입고 있는 장비중에 안면모나 플리스자켓, 고어텍스 자켓, 트로저 등은 어떤 상황에서도 체온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장비일 것이고 그것은 경험에서 나온 장비일 터였다.
그들이 안개뒤에 희미한 불빛을 남기고 사라지는 어둠속을 창을 통해 물끄럼히 보고있던 사람들은 이제야 좀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한두시간뒤의 일이지만 대피소의 숙박자들은 구조대와 자원봉사자와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그들이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았다. 하지만 두어시간동안 대피소의 분위기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공단의 직원들 말에 의하면 초속 20미터 정도는 흔히 부는 바람이라고 한다. (심할 때는 초속 40미터의 바람이 불 때도 있다고 한다. 이것은 가장 강력한 태풍에서나 불 바람이다. 이런 바람은 바람부는 소리자체가 다르다) 영상10도라고 하더라도 이런 바람을 맞으면 저체온증에 걸릴 위험성이 있다. 그런데 영하의 강풍이라면 위험은 치명적일 수 있다. 일이 이러한데 무엇을 믿고 제대로 장비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 올라오는가.필자옆에 자리를 잡은 분들도 그냥 조금 들어갔다가 나오자고 하고 정상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7일 아침. 일출을 보러 강풍을 뚫고 대청봉을 오른다. 새벽에 일어나 밖에 나와보니 눈이 현관앞에 수북히 쌓여있고 바람의 흐름때문에 문이 잘 닫히지를 않는다. 불이 훤히 켜진 전화박스 안에도 장딴지까지 빠질만한 눈이 수북히 쌓여있다. 화장실로 내려가는데 등을 떠다미는 바람의 힘이 여차하면 복도 바닥에 패대기를 칠 정도다. 그리고 밤사이에 바람이 정면쪽에서 불어온다. 어제밤엔 건물 뒤쪽에서 불었는데. 하얀 설연이 달빛아래 휘날리고 천불동저쪽은 속초의 불빛이 찬란하다. 삼각형의 정상은 음영이 또렷하고 정상 오른 쪽엔 그린듯이 반달이 떠있다. 정말 기가 막힌 경관이었지만 그 모든 것의 반주로 오직 귀에 들려오는 음악은 폭풍이 부는 소리뿐이었다. 해뜨기 직전 정상에 도착했는데 설연이 몰려와서 얼굴을 때리면 마치 모래바람을 맞은듯 안면이 따끔거린다. 평생 사라호때 함석지붕이 어디로 부턴가 날아와 우리집 뒷마당에 떨어진 바람을 경험한 이래로 이런 바람을 맞딱뜨리기는 처음이다. 해가 뜨고 설연히 휘몰아치는 설악능선은 정말 인간의 세계는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는 저아래 설악동은 얼음이 녹고 계곡의 물빛이 매혹적일 정도로 파래지는 봄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설악동을 빠져나올 때 심지어 아이젠도 하지않고 천불동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말로는 만경대까지만, 귀면암까지만 하지만 설악산을 아는 사람들은 일단 계곡에 들어서면 되돌아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무슨 수로 초속 20미터 영하의 폭풍이 분다는 것을 설득시킬 수 있단 말인가. 봄에 취한 사람들에게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만경대까지 가겠다는 젊은 친구 두 사람은 귀면암까지도 못갔을 것 같다. 중도에 완전한 빙판이 두 서너군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사히 되돌아갔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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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동에서 올라오며 바라본 설봉(대청봉?), 소청능선에서 내려다본 공룡릉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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