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게시판2009. 2. 5. 17:45

청학동은 어디메뇨? 


지리산에 청학동이 있다고 하여 그 땅을 한번만이라도 보고자 옛부터 지식인은 지식인대로 무지랭이는 무지랭이대로 이 물산이 풍부하고 전란의 흉포한 손길이 미치지 않는 복받은 땅을 목표로 지리산을 찾아 헤매었다. 
청학동을 찾아나선 사람으로 처음 기록에 보이는 이는 고려시대의 시인 이인로였다. 그는 파한집이란 책에서 청학동을 찾아나서 좁은 곳을 지나 넓은데로 나서기도 하고 지리산의 선경과 같은 아름다운 경치와 양전옥토라고 할 넓은 땅을 만나 사람이 살만하다고 했으나 청학동은 아니었다고 하고 있다. 사람이 먹을 걱정없이 살만한데다 선경과 같은 고운 경관이 있는 곳인데도 청학동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에게 이 유토피어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니까 정작 청학동을 찾았다고 해도 그는 그것을 청학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이인로가 청학동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답사했던 곳은 지금의 화개천계곡일대인 것 같다. 고운 최치원의 전설이 남아있는 이곳을 시인인 그가 지목했을 가능성이 크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점필재 김종직이 "유두유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악양이고 그의 제자 김일손은 "속유두유록"에서 쌍계의 동쪽에서 청학동을 찾았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골짜기가 험해 처자와 함께 들어와 살곳은 못된다고 하고 이인로가 정작 청학동을 보고서도 청학동을 찾지 못했다고 한 것은 유토피아와 현실을 동일시할 수 없었던데 기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하동군 화개동천, 악양면일대, 지금의 청암면 청학동, 그리고 세석평전을 청학동일 것으로 지목하고 있는데 세석평전을 빼면 모두 하동군에 속한 지리산 주능선 남쪽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수없이 남아있는 청학동도라는 그림을 보면 좌로 반야봉에서 우로 천왕봉에 이르기까지의 지리산남쪽 산록의 산에 둘러싸인 "길지"로 다분히 풍수지리적인 명당자리에 해당하고 있는 땅이다. 그러니까 실재하지 않는 땅일 수도 있는 것이 지리산 청학동이다.


 이상의 지역에서 공통점이 되는 것은 모두 지리산남쪽의 산록이라는 사실. 들어가기가 어렵고 나가기도 어려운 곳이다. 대지리산이 북쪽의 찬바람을 막아주는 지리산 남쪽 산록은 겨울철 이곳을 여행해보면 천하에 복받은 땅이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초봄 벚꽃이 필적에 화개동천에서 이틀을 묵으며 대성골을 지나 세석, 영신봉까지 산행을 하든가 화개동천을 오르내리며 푸르고 맑은 개천가에서 봄바람을 쇠면서 느낀 것은 이곳에서 한번 겨울을 나봤으면 하는 소박한 바램이었다. 지리산산록에는 무수한 마을이 있지만 어느해 봄 섬진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본 하동군 악양면의 아늑한 산골이 그럴 수 없이 좋아보였다. 어머니 산 지리산이 자애로운 두 팔로 곱게 안고 있는 듯이 산록아래 형성된 펑퍼짐한 땅은 지리산이 그 슬하에 자식을 키우고 있는 듯한 느낌, 문자그대로 하나의 복지라는 느낌이 왔다. 오후의 햇살이 고즈녁히 비치는 악양면은 마치 지리산 산신령이 너희들은 여기 요렇게 오손도손 잘 살아라하고 손으로 동그랗게 원을 그려 준듯이 좁은 곳을 지나면 넓게 펼쳐지는 산자락이 너무도 안온해 보였다. 그런 느낌을 어디선가 썼더니 그곳출신의 산꾼 한분이 혹시 악양에 오면 자신이 악양 성제봉산행을 안내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외에 구례군의 온천지대도 지리산의 혜택을 받는 길지로 보였다. 바래봉에서 본 운봉일대도 하늘에 떠있는 듯한 옥전이 꽤 광활하여 복지로 보였으며 피아골 일대도 그러했다. 진주 산악인인 성락건씨가 쓴 "청학동은 존재하는가?" (1999년 7월호 '산')라는 글을 보면 악양사람들은 악양이, 청학동 사람들은 청학동이, 의신사람들은 의신이, 불일평전에 사는 변규화씨는 불일평전이, 또 선유동이나 고운동을 청학동이라 하는 듯이 보인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주장이 다 옳다고 본다. 지리산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든 청학동인 것이다.


 위에 언급한 성락건씨는 세석산장옆의 영신대에서 며칠을 보내면서 지리산에서 사라진 기인 허우천의 행적을 찾으려고 했는데 이곳이 "영험을 얻는 신비한 곳"이라고 하고 이 일대에서 동굴 여러개를 발견, 그 안에서 사람이 기거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으나 허씨의 행적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영신대라는 이름은 신을 맞이하는 곳이란 뜻이니 이런 이름이 공연히 붙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아침 일찍 이곳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보며 사진을 찍은 적이 있는데 사진속에 바위의 일부를 넣어서 찍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 바위는 마치 사자가 포효하는 듯한 형상의 바위였다.(지리산 사진 참조) 그리고 세석산장에서 하루밤자면서 새벽녘에 일어나 촛대봉쪽에 걸린 달을 보았는데 달이 얼마나 컸던지 쟁반만했다. 세석은 평지와는 다른 곳이 분명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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