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2010. 1. 22. 11:51

아름다운 설화는 잊히지 않는다. 소백산의 설화가 그랬다. 시간과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이 기억이지만 유독 소백산의 설화만은..망각의 늪을 모른다. 금년에도 소백산설화는 아름다왔을 터이지만 오늘 들어보니 엊그제비(2010년 1월 19,20일)에 소백산의 설화가 많이 녹아버린 모양이다. 비를 맞고 소백산에 갔다온 친구의 전언이다. 폭설이후 이어져왔을 수려한 설화를 보지 못해 안타깝다. 21일이후 소백산에 눈이 오지 않았다면 아마 소백산설화는 보지 못하거나 보아도 평년수준도 못될 듯하다.

소백산설경 화보



12시간만에 소백산의 설화를 보고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니 이사람이 속도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팔팔하던 때에 비해서 상당히 얌전하게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남의 차를 막무가내로 추월하며 차를 몰던 때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용히 갔다왔다. 필자는 도시의 훤소와 눈에 뒤덮인 한 적막한 산사이를, 그러니까 시간속의 세상과 시간밖의 어떤 곳을 12시간만에 갔다 온 것에 대해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서울 봉천동 집을 출발한 것이 오전 9시경, 집에 도착한 것이 9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그 12시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여행가방을 꾸리고, 속옷을 챙기거나, 치솔이나 면도기를 건사한 것도 아니고 집을 떠나므로 며칠 못볼 소중한 것들을 눈여겨 보고싶어져서 방안을 두리번거리거나 하며 집을 나서는 식의 여행길을 떠나온 것은 아니었다. 필자가 집을 떠나 산으로 가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여행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오늘 이 12시간짜리 여행은 누가 뭐라해도 기막힌 여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 어딘가 멀고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온 기분이 드는 것이다. 소백산은 자주 가는 산이고 큰 산치고는 서울에서 가깝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중앙고속도로 단양나들목에서 나와 단양읍내를 거쳐 천동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12시가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엊그제 서울지방에는 꽤많은 눈이 내렸지만 이곳 소백산자락엔 별로 눈이 많은 것 같지 않아 길이 미끄럽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웠기는해도 산행을 생각하면 속으로 실망까지는 아니어도 좀 허전한 느낌이 듦을 어쩌지 못한다. 엊그제 올랐던 명지산 사향봉보다 눈이 적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이때만해도 이미 산을 오르는 사람은 별로 안보인다. 내려오는 시간을 걱정해야 할 무렵이었던 것이다. 눈덮인 큰 산을 오르내리려면 5-6시간은 걸릴터인데 해가 지는 시간은 5시가 아닌가. 어두워진 뒤에 하산한다는 얘기가 된다. 가쁜한 차림의 보통산꾼이라도 시간이 모자랄 판인데 사진을 찍어야할 필자로서는 서둘러야 할 시간이 분명했지만 쓸데없이 늑장을 부린 건 아니라고 해도 필자는 계속 늑장을 부렸다. 드디어 계곡안으로 들어간다. 매표소직전 다리아래의 협곡을 내려다보는 것은 소백산에 오면 반드시 하는 일이다. 여기에 번듯한 다리를 놓을 게 아니라 청류가 암곡을 빠져나가는 절경을 살리면서 등산인들이 출입할 수 있도록 했으면 소백산의 대표적 협곡중의 하나를 살리고 소백산의 명망도 유지할 수 있었으련만 하는 아쉬움을 곱씹는 곳이다. 매표소를 지나 올라가니 길바닥은 완전히 눈에 뒤덮여 있다. 길가 계류는 위에 얼음이 두껍게 언 탓으로 얼음아래를 흐르는 물소리만 들리다가 깊은 소가 나오면 둥그렇게 녹아 남실대는 물살과 투명한 바닥을 드러내곤 한다. 갈수기 치고는 수량이 상당히 많다. 골짜기는 커다란 둥근 바위가 많아 눈과 얼음이 뒤덮고 있음에도 전체적인 색깔은 검정에 가깝다. 바윗돌들이 거의 검정색이나 다름없는 검은 회색이었던 것이다. 천동계곡을 빠져나가는 곳은 산의 크기에 비해 아주 좁고 주위 산등성이는 아주 높다. 그래서 경삿길을 어지간히 올라가야 어깨가 높은 능선의 위압스런 존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고 햇빛을 차단하던 산그림자도 좀 비켜선다. 올라갈수록 주위의 이깔나무 숲이 겨울 소백산의 오랜 인상을 오늘 다시 상기시켜준다. 어느해 겨울 따사로운 햇빛이 내려쬐던 이 이깔나무 숲길을 한가로이 걸어내려오던 기억이 난다.

야영장과 매점이 있는 비로봉 코스의 중간지점에 해당되는 곳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설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한 숲이 된다.

걸어가는 방향으로만 시선을 주면 길은 눈꽃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터널이어서 터널을 따라 내려오는 사람들에게서는 정상과 주목지대의 상큼한 눈의나라 얘기가 묻어나올 것만 같다. 올라가는 사람들은 가쁜 숨을 쉬거나 때로는 이마의 땀을 훔치기도 하지만 내려오는 사람은 자켓의 후드를 뒤접어쓰는 것도 모자라 후드의 끈을 당겨 바람 한점 들어가지 못하게 눈과 코만 드러낸 얼굴로 내려온다. 그만큼 설한풍이 모질게 불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얼굴들은 하나같이 흥분한 표정이다. 이런 설화와 이런 군상들의 표정을 이 나이가 되도록 많이도 보았건만 왜 또다시 가슴이 설레는 것일까? 너무도 많이 봐서(산행을 많이 하는 편이니..) 이젠 신물이 날만한데도 왜 그 광경은 전혀 평범해지지 않는 것일까? 왜 눈이 덮인 설목의 가지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으로만 보이는 것일까? 평일에 소백산에 온사람들은 아무래도 나이지긋한 산꾼들이 많은 편이다. 그들이라고 소백산, 아니면 태백산에서 아름다운 설화며 설릉을 전혀 안보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하지만 그들이 환희에 젖어 있다는 것 그것이 그들과 그들이 오고가는 설화의 터널안의 분위기를 이름모를 활기로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쨌거나 설화의 터널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들의 붉은색 또는 푸른색 자켓이며 배낭이 주위의 설화로 장식된 울창한 하얀 숲과 너무도 잘 어울린다. 그리고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젊은 목소리와 생기가 반들거리는 얼굴모습이다. 모두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눈꽃 터널 안에서 마술에 휩싸인듯 젊어진 이유이다. 샘터에서 쉬고 있는데 우정 가까이 다가와서 "올라가는 길이냐 아니면 내려가는 길이냐?"고 집요하게 묻는 사람도 있다. 올라가는 길이라면 "저 위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드리겠다는 태도다. 수많은 언설이 귓가를 스치는데 유난히 부드럽고 귀속에 깊이 스며드는 소리로 나지막하게 "정상은 정말 환상적이에요."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온다. 그것은 "앨리스 인 원더랜드"의 앨리스가 낭랑하게 시를 읊듯 하는 말소리였다. 그 뒤로 다른 어떤 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고 오직 그 여성이 한 이말만 귓가를 맴돈다. "환상적이에요, 환상적..." 당신은 진정 그 말의 뜻을 알겠지. 그녀의 말은 이 말에 대한 나의 이해의 폭이 어떤것인지 집요하게 물어오고 있었다.
아이들도 두 서넛 지나가고 나이가 꽤 많은 분들도 한 무리 내려가고 아주머니 산꾼들도 다수 하산하고 있다. 그 눈꽃 터널을 통하여 시간이 빠져나가고 있다. 숲지대를 지나 대궐터 능선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위에 나서자 능선위의 고목이 시야에 들어온다. "한국의 산" 어디엔가 사진이 있을 바로 그 나무다. 그 나무 뒤로 둥근 달이 보인다. 10수년전 새벽 삼가리에서 정상으로 올라오던 때가 생각난다. 능선에 새벽달이 교교히 비치고 있었는데 설화목에 달빛이 비치어 일찌기 보지 못한 꿈결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던 기억이 남아있다. 푸른 하늘속의 흰달과 부근의 지상의 것이 아닌듯한 눈과 설화, 설화 숲뒤에 버티고 선 설릉이 시간이 정지한 듯한 어떤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었다.

내려가던 어떤 분이 달과 고목(가지가 거의 없고 둥치만 남아 있는 주목)을 넣어 사진을 찍어보라고 카메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필자에게 "지시"한다. 아마 그에게 카메라가 있다면 그렇게 찍겠다는 뜻이거나 아니면 이미 그 광경을 찍었다는 뜻인듯하다. 고목나무에서는 월악산이 멀리 보이는데 오늘은 그전처럼 그렇게 선명하지는 못하다. 능선은 1330m로 이 능선에만 올라서도 백덕산 높이정도는 올라온 셈이 된다.
설릉에 서면 비로봉이 보이고 길은 주목군락지가 있는 오른쪽 능선아래 사면으로 들어간다. 거기에 무거운 눈이 얹힌 가지들이 끊임없이 일렁이고 그 아래로 지금까지 보아온 설화의 터널보다 더욱 깊고 더욱 하얀 터널이 하얀 꿈속인양 안으로 멀어지고 있다. 이쪽은 북사면의 계절풍에 노출된 눈이 불려와 쌓이는 곳인데 주목과 활엽수등 으로 이루어진 울창한 숲이 자리잡고 있는 안부옆 산록인 이곳은 바람도 별로 불지않아 산사면에서 불려온 눈이 당연히 오직 숲을 단장하는데만 쓰인다. 소백산의 주목 군락은 비로봉 아래 산사면(대피소 아래쪽)에 따로 철망을 쳐서 보호되고 있지만 대궐터능선에서 오른쪽 산사면으로 주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어서 주목터널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곳 길옆의 주목 몇그루는 소백산을 찾는 산꾼에게 가장 낯익은 주목이고 당연히 소백산의 주목을 감상하는데 필수적이다.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소백산에서 주목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한 곳이다. 바람이 없는 이곳은 완전한 설국이 형성되어 있었다. 주위의 주목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무계단길위를 걸어간다. 몇 톤은 됨직한 눈을 이고 서 있는 주목은 그래도 가쁜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얼굴은 붉은 편이다. 눈 우산처럼 하얀 그늘이 진 주목아래로 사람들이 들어가 사진을 찍었는지 눈위에 발자국들이 찍혀있다. 억척같은 눈무게를 감당하고 서도 가지하나 상하지 않은 주목을 보면 죽어천년 살아 천년이라는 주목의 수식어가 단순한 허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터널 바깥 쪽에 둥치만 바람을 맞고 서 있는 고목주목도 한때는 저렇게 태산처럼 큰 눈을 뒤집어 쓰고 있었으리라.
머리위에 드리운 눈 저고리를 입은 주목의 가지들을 넋을 놓고 바라보는 사이 얼핏 이 주목숲에 설한풍이 몰아치며 눈 내리는 광경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것은 들판에 눈이 내려 땅위에 켜켜이 쌓이는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나무의 위 아래 구분없이 눈으로 둘러싸이려면 온 세상이 요동치듯 나무의 꼭대기든 밑둥치든 구분할 것 없이 일체의 공간이 눈으로 꽉 들어차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얌전히 쌓이기만 한다면 이런 위아래 구분없이 눈으로 칠갑을 한 듯한 풍경은 만들어지지 않았으리라. 사진을 몇 장찍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나무계단지대를 빠져나오면 활엽수림대의 평범한 설화숲이 나오고 곧 능선(주능선 곧 백두대간)에 닿는다. 안부에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가 금천계곡이다. 안부에서는 급사면을 이룬 영주쪽 사면에 북사면을 훑어온 바람이 쏟아부운 심설에 뒤덮여 있다. 기울어진 햇살속에 연화1봉과 천체관측소, 연화2봉이 보이고 죽령고개 저쪽 도솔봉의 우람한 스카이라인이 시야에 들어온다. 비로봉 아래 주목지대너머 멀리 신선봉이 보이는 길목에 벚꽃이 핀듯한 설화를 뽐내며 차거운 바람을 즐기는지 흔들흔들 겨울 하늘을 흔들고 있는 한 그루 빼어난 설화목이 있다. 능선 산록의 철쭉류는 마치 산호가 핀듯 가지마다 핫도그처럼 둥글게 가지를 감싼 설화가 눈길을 끈다. 이것은 2002년 겨울 소백산이 창작한 새로운 작품이다. 나중에 내려오며 역광으로 보니 이게 꿈인가 생기인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주능선에 올라서자 소백산 특유의 설한풍이 매섭게 하체를 훑어간다. 위에 입은 고어텍스자켓은 제역할을 하는데 윈드스토퍼가 아닌 보통 바지는 삼베옷을 입은 듯하다. 겁이날 정도로 냉기가 술술 통과해간다. 엉겁결에 착용한 스패츠가 체온강하를 어느정도 막아주는 듯하다. 동절기 능선산행시 주의할 대목이다. 비로소 소백산에 온 것이 실감되기 시작한다. 길은 목책과 목계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편안한 보행이 가능하지만 바람때문에 마치 급류를 속을 걸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고 가까운 듯 먼 두리뭉실한 비로봉과 정상 왼쪽 능선의 형상은 몽환속인듯 결코 가까워지지 않는다. 주능선엔 인적이 없다. 이미 모두가 내려가버린 모양이다. 헤엄을 치고 있다면 이제 10미터 이상 헤엄을 더 쳐야한다면 급류에 떠내려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 무렵 비로봉 정상 표지석이 보인다. 정상에 도착하자 말자 비로사 코스가 보이는 사면의 계단으로 내려가 바람을 피한다. 정상에서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시야에 들어온다.
정상에 있는사이에 한 팀이 올라와서 비로사코스로 내려가고 난 뒤 정상에는 다시 적막이 찾아온다. 엄청난 한기를 몰아오는 바람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소백산 정상에서는 누구도 명함을 내보일 수 없다. 오직 바람밖에는. 되돌아가는 길은 거의 서향에 가까워 맞바람이라 후드를 뒤집어쓰고 안면끈을 잡아당긴 채이건만 어디로선지 황소바람이 들어온다.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한다. 주목 전망대에 와서 아무도 없는 산사면의 철망안쪽에 눈사태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주목군락을 바라본다. 대피소로 가는 길가의 철쭉떨기에 화려한 눈꽃이 수북히 피어 시선을 끈다. 해질무렵이라 역광이 눈 핫도그같은 설화에 비치어 핫도그마다 점층적인 휘도가 드러난다. 그런 것이 무엇때문인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고 그렇게 정갈해보일 수가 없다. 대피소를 지나 천동갈림길로 오는 사이에 능선사면을 보니 지는 역광에 철쭉설화 웃부분이 녹은 뒤 얼어버린 얼음알갱이가 햇빛을 받고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정성들여 카메라에 담으로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론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 광경은 어느해 설악산 한계령을 오를 때 눈이 온 뒤에 날이 포근하여 녹아내리다가 얼어버린 희한한 일이 일어나 온 숲의 나무마다 가지끝에 손가락만한 투명한 얼음이 얼어 바람이 불면 장엄한 얼음실로폰소리같은 것이 났던게 기억난다. 정말 하느님의 솜씨는 기가 막히는 데가 있다. 인간의 상상력으론 추측하기 힘들다. 오늘봤던 능선의 남태평양바닷속 산호초같은 철쭉 설화만 해도 그렇다.
갈림길에 와서 연화봉쪽으로 조금 올라가서 달라진 풍광을 즐기다가 되돌아 와서 부근을 살핀다. 연화봉쪽으로 보니 능선아래 사면 허공에 돌개바람이 일어나 눈가루가 둥글게 뭉쳐 중천에 떠돌고 있다. 아! 이 시간 한겨울 오후 5시의 설릉의 대기는 투명하고 바람은 너무도 차구나. 그리고 얼마나 호젓한 시간인가? 마치 시간이 정지한듯 하지 않은가? 올라갔던 길을 내려간다는 것은 하산길에 해가 질 경우엔 갈길을 걱정하지 않아서 좋다. 늘가는 명지산이라면 지난번 사향봉때처럼 길없는 너덜지대를 내려가도 좋지만 소백산 같은 산에서는 늦은 시간에 개척하듯 길없는 곳을 다니는 것은 금물이다. 갈림길 부근에서 천천히 천동계곡쪽으로 내려오면서 주목지대에서 이른 오후에 봤던 주목의 설화를 다시 천천히 바라보고 1330m 능선을 지나 대궐터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숲속엔 낮에 들리던 경탄소리, 설화와 잘 어울리던 울긋불긋한 옷차림들의 기억. 이런 것들의 색깔이 바래어진 뒤의 적막감이 지배하고 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들어섰던 주목앞의 발자국은 그대로 남아있다. 야영장이 가까워질 때 설화의 숲은 한순간 은은한 핑크빛으로 물든다. 곧 해가 떨어질 것 같다. 숲이 들고 일어나 해를 가리고 있지만 그래도 일몰은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발걸음은 조금도 빨라지지 않는다. 이런 걸음으로 계곡을 빠져나가려면 적어도 1시간반은 걸릴듯하지만 발은 독자적으로 행동하듯이 유장하고 단호하며 제 주인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해가 진다. 계곡의 밤은 그러나 완만하게 다가온다. 한동안은 라이트없이도 충분히 걸을 수 있다. 사념이 넘나드는 듯도 하고 희미해지는 주위의 숲이 인상의 그늘을 지우기도 하는 듯 현실과 몽환이 교차하는 듯하고 꿈처럼 권태롭고 감미로운 저녁시간 혼자 빈협곡을 걸어내려오는 시간은 낮의 충격이 피속으로 용해되어 추억으로 남겨지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센치멘탈리즘같기도 하고 감흥이 감성의 선율을 은은히 탄주하는듯도 한 비할 데 없이 소중한 시간이다. 이때만큼 여수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하는 때는 없으리라. 단 몇시간인데 집에서, 도시에서, 보통의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그렇게 고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여기 소백산이 처음은 아니다. 천안광덕산, 명지산, 중원산, 황악산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오늘은 나이탓인지 그 맛이 감미롭다. 누군가 말했다. 혼자 하지 않은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고. 오늘 소백산 설중산행은 내가 생각해도 최고급의 여행임이 분명하다. 바람과 엄청난 추위, 기괴한 설화, 웅대한 조망, 그리고 일몰, 밤, 골짜기에 가득히 부어지던 달빛, 6시간의 산행, 주목, 한낮의 달빛, 산호초... 주차장에 오니 6시40분쯤 되어있고 하늘엔 무수한 별들이 반짝인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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