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연인산에 올랐다. 요즘 들어 1년에 너댓번씩 올라가는 산이라 특별한 기대같은 것은 없었다. 태백산이나 소백산, 아니면 설악산이나 지리산엔들 적설기에 맞춰 왜 매년 한두번씩이라도 오르고 싶지 않겠는가? 우선은 부지런해야 하고 다음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시간과 의옥, 지리적으로 가까운가하는 문제도 감안해야한다. 그리고 끝내주게 좋았던 기억이 없어야 한다. 그래야 더 가고싶을 터이니까. 소백산, 태백산, 계방산, 백덕산, 지리산, 설악산에서 한두번 이상씩은 최상의 설화와 심설을 맛본 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비슷한 경험은 했기에 그래도 아름다운 설화가 무수히 왔다가 가도 옛기억을 돼새기며 위안을 삼곤한다.
지난번 폭설과 이어진 엄청난 한파때에 기막힌 악운 때문에 누워있어야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아쉽기만 하다. 지난번 용문산에 이어 연인산에 오른 것은 뒤늦게 나마 봄이 얼마남지 않은 산에서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보기위함이다. 그리고 지난번 용문산때와 마찬가지로 월요일에 산행을 하기로 한다.
적막에 싸인 겨울산은 그것 자체가 한폭의 그림이다. 야단스런 색깔이 싹 사라진 건필(乾筆)로 그린 컬러없는 거친 필체와 여백으로 이뤄진 수묵화이다. 양지쪽엔 군데군데 더러 녹아있지만 거의 대부분은 하얀 눈에 덮여있다. 산록의 흰눈에 신갈나무나 거제수나무의 그림자가 드리운 장면은 겨울산행의 낮에 볼 수 있는 가장 흔한 그림이지만 그 해맑음은 뇌수를 탈색시킬 정도이다.
능선을 오르며 정상일대의 설화를 바라볼 때만 해도 올라가면 다 녹아버릴 아침에 형성된 상고대정도로 생각했고 얼마 안가 덧없이 사라질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정막 올라가 보니 그게 아니었다. 상고대가 아니었다. 빙화(氷花)였다. 그리고 연인산이 철쭉철이 아닌때에 이렇게 아름답게 꽃핀 것을 본 적은 일찌기 없었다. 1m넘게 눈이 쌓여 정상에서 단 3m도 진행하기 어려웠던 어느해 겨울도 이렇게 아름다웠을까 기억에 없다.
빙화는 얼음꽃이다. 비가 오다가 갑자기 기온이 떨어지면 빗물은 얼음꽃이 된다. 빗방울이 그냥 얼어버리는게 아니라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얼음이 되어 납작하게 형성되는데 다음 빗방울이 그 아래 자리잡고 다시 납작하게 붙어 결국엔 가지를 따라 길게 형성된 빙화가 되는 듯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그 메커니즘의 신비를 실제로 본 것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괜히 아는척하는 게 아닌가 싶어진다. 빙화는 하루아침에 생길 수도 있지만 상고대와는 달리 햇빛이 비쳐도 영하의 기온이 유지되면 오래 피어있을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빙화가 연인산 철쭉나무에 잔뜩 붙어 있는 것이었다. 며칠전 비가 온 적이 있으므로 그때 빙화가 생긴듯하다. 적어도 오늘 생긴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오늘은 오후에 날씨가 꽤나 포근해져 가지로부터 뭉텅뭉텅 빙화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목덜미에 떨어지기도 한다. 상고대같으면 이미 오래전에 없어졌으리라.
산행코스: 백둔리 장수마을-소망능선-정상
마을에서 소망능선을 타고 장수능선에 합류하는데 2시간, 장수능선에서 연인능선 합류지점까지 30분. 여기서 정상까지는 5분거리.
백둔리로 들어가는 찻길이 미끄러울듯 하여 염려했으나 장수마을까지는 제설이 잘 돼 있어서 신경쓸 일이 없었다. 장수마을에서 장수고개로 가는 다리옆의 공간에 차를 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다리건너 장수고개로 가는 임도는 깊은 눈에 덮여있다. 큰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펜션지대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산입구까지는 차도이지만 눈에 덮여있다. 길가에 잣나무숲이 나온다. 바닥에 눈이 깔린 잣나무숲안은 정갈하기 이를데 없다. 소망능선이 시작되는 코스길은 잣나무숲을 왼쪽에 기고 올라가는 급경사길이다. 잣나무숲은 정상에 올라갈 때까지 길가에 서너번정도 나온다. 빽빽히 들어선 잣나무숲과 그 아래 바닥을 덮고 있는 눈을 보면 겨울산행이 결코 삭막한 산행이 아님을 알 수 있게 한다. 지난번 폭설이 온 뒤로 비가 온 터라 눈이 깊지는 않다. 그러나 양지쪽 일부를 빼고는 거의 흰눈에 뒤덮여있다. 눈이 녹은 양지쪽 산길이라도 낙엽아래는 얼음이 얼어있어서 아이젠을 하지않고 올라가거나 내려가면 미끄러질 가능성이 크다.
위로 올라갈수록 신갈나무 거목숲으로 변하는데 겨울햇살이 나무들의 그림자를 드리울 때 눈밭에 어린 그림자의 은영이 은은한 반면 나무줄기는 검은 갈색으로 강열하여 그 대조가 극단적이다. 이런 경관이 겨울의 산행을 아름답게 만든다. 어느산에나 있을 수 있는 경관이지만 웬지 이런장면이 무척 감동적이다. 눈과 숲의 대조라고 할까. 소망능선이 끝나고 장수능선에 합류하기전 급경사를 올라가느라면 나목숲사이로 명지산이 오른쪽에 보인다. 명지산도 정상능선엔 상고대가 피어서 하얗다. 그러나 장수능선-연인능선합류지점에 올라와 보니 주능선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는 것은 상고대가 아닌 빙화였다. 빙화끝에 상고대가 조금 들어붙어있기는 했지만.
정상아래 야생화가 그득히 피는 지역은 양지쪽이라 빙화도 상고대도 녹아버리고 없지만 대충 해발 1000m이상높이의 능선과 그보다 낮은 곳이라도 응달의 산록은 빙화로 덮여 하얗다. 우정능선의 상판리쪽 산록이 그렇고 정상에서 명지산으로 가는 능선의 북서방향산록이 그렇다. 어쨌거나 금년엔 추위가 혹독했고 눈이 자주 내린 탓으로 빙화라는 의외의 현상이 생긴듯하다. 아마 빙화가 달린게 하루이틀은 아닌듯하다. 그러나 정상능선에 올라올 무렵은 기온이 꽤 포근해져서 여러곳에서 빙화가 땅위로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북서쪽 산록이거나 바람이 센 능선에서는 그런 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았다. 거의 1시간가량 정상과 명지산쪽 능선3, 400m까지 내려가보면서 빙화를 찍고 정상에서 내려올 때 바람이 부는게 예사롭지 않았다. 집에서 냉장고문을 열 때 느끼는 냉기같은 것이 그 바람에 실려오고 있었다. 기상청에서 내일아침 기온이 영하 12도라고 예보한 것은 바로 이 바람의 영향으로 인한 기온하강예상일 터이다. 명지산이나 연인산꼭대기에서 뺨을 때리던 바람은 그 다음날 아침 서울의 기온을 큰폭으로 떨어뜨린다는 것을 여러번 경험했다.
계속되는 산행기를 구독하시고 싶으시다면 |